환경그늘에 앉아 .... 1


   ‘그 때 그 일만 아니었어도...’ ‘내 아이는 그런 아이가 아닙니다. 친구 때문에...’ ‘그 놈 때문이야.’ ‘누군가 밀어주는 사람만 있었어도...’ ‘돈이 없었어.’ ‘왜 우리 부모는...’ ‘너무 바빠서 말이죠.’ 인생들의 대변(?)들이다. 너절하지만 그럴듯한 이유들 말이다. 기억나는 영화가 있다. 박하사탕, 암울한 내나라 역사, 그걸 간결하고 진하게 나열한 영화다. 주인공의 벌건 눈의 외마디를 기억한다. ‘나~ 돌아갈래~’ 크게 벌린 입만큼이나 처절한 절규였다.    


   ‘민중의 지팡이의 본분이 뭐야. 정치는 썩었고, 경제는 도둑들로 가득해!’라고 말하며 사인하고 있었다. 교통 위반 딱지 맨 아래 란에... 법을 어긴 건 난데. 참 웃긴다. 늘 기억되는 섭섭함, 누군가의 무례함, 뼈에 새겨진 무시당함, 우리를 꽁꽁 묶는 줄들이다. 우리의 현재엔 이런 과거의 줄이 꽤 된다. 그리곤 이것들은 곧 뭔가 되지 못한, 하지 못한 것에 이유로 이용된다. 환경은 우리에게 가장 그럴싸한 핑계거리를 제공한다. ‘잘되면 내 탓, 안 되면 조상 탓’, 옛 말로 틀린 말 아니다. 제자 훈련 하던 중 부족함 느껴, 상담을 공부한 적이 있다. 첫날, 교수의 말이었다. ‘환경, 중요합니다. 어떻게 자랐는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현재의 우리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환경, 그게 현재의 우릴 만든단다. 그래서 상담에서는, 아기 때, 젖을 울면 먹였는지, 정기적으로 주었는지. 똥, 오줌을 스스로 가렸는지, 맞으면서 가렸는지, 아기가 배꼽에서 나왔다고 배웠는지, 사실대로 알았는지를 꽤나 중히 여긴다. 지금의 우리는 그것들의 결과로 보기에 그렇다. 사회 적응력도 여기에, 수용하는 폭도 이것에, 정상적인 생활도 바로 ‘환경 그늘’에 달려 있다고 심리학은 주장한다. 환경이란 힘, 대단한 거다. 지금의 우리는 지나간 환경이 빗은 작품이다. 그러기에, 지금의 당신은 당신이(?) 아니란 얘기다. 복잡하다. 어쨌든, 인생이 거기에 달려 있단다. 자신을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신의 찬란하고 복잡한 환경을 봐야 한다. 수유 여부와 대소변 가림 그리고 성교육은 재대로 받았는지, 그게 지금의 우리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복수심으로 불탔다. 팔림에 울었고 억울함에 전율했다. 차디찬 감옥에서 흘린 피눈물... 그의 울부짖음은 온 감옥을 떨게 했다... 삼류 무협 소설의 한 대목 같다. 그러나  이건 성경의 한 대목이다. 형제들의 미움 받아, 팔려 노예로 거기에 죄수로 살다 죽어야 했던 요셉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이를 갈아야 했다. 복수를 생각해야 했다. 그럴 수 있었다. 아니 그러는 게 당연했다. 아니면 좌절하고 노예근성으로 살아가든지. 어떤 걸 선택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환경이 그랬으니까. 하지만 성경에 그런 기록이 없다.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이 요셉을 인하여 그 집안이 잘 되게 하셨다.” 그리고 이런 기록도 있다. “요셉 으로 인해 감옥이 좋아졌다.” 감옥이 좋아졌단다. 좋아질 수 없는 그곳이 그렇게 되었단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었다. “그로 인해, 나라가 형통했다.” 게다가, “다른 나라들이 그로 인해 살게 되었다.” 요셉, 그는 전 세계의 빈곤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우린 보통 그를 이렇게 말한다. 노예에서 총리가 된 사람, 성공한 사람, 잘 된 사람, 우리의 안목은 제대로 볼 걸 못 보게 하기도 한다. “아브라함이 공짜로 땅을 얻었대. 그것도 무진장.” “욥이 한 몫 잡았대. 2배로!” “다니엘이 승진했대. 높은 자리로” “야곱이 한 건했어.” 여기에, “그거 다 하나님이 하신 거래. 축복이래.” 어떤 단어를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거 아니다. 중요한 건, 어떤 눈으로 성경을 보느냐다.


   정말 주목 할 게 있다. 요셉을 그런 요셉으로 만든 요인 말이다. 요셉, 그는 환경을 탓하고 거기에 모든 핑계를 두지 않았다. “그것 때문이야.” “형 때문이야.”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라고 말하지 않았다. 요셉, 그는 오히려 그 그늘을 벗어난 사람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주어진 환경을 바꾼 거다. 환경 때문에 달라지지 않은 사람, 환경이 어쩔 수 없던 사람, 오히려 환경을 바꾼 사람,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히브리서는 말한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고. 그다. 감옥에서 찬양한 사람이 있다. 바울이다. 그는 감옥에서 찬양했다. 아니다. 다시 살펴보자. “감옥에서도 찬양했다.” 어디서나 하던 거, 거기서도 한 거다. 옥 지기들을 전도했다. 감옥지기의 집에 심방까지 했다. 죄인의 몸으로. ‘생명 건 심방’ 거기서만 했나? 아니다. 거기서도 한 거다.


   한 번 더 말해보자. 좋은 환경에서 한 것을 나쁜 환경에서도 한 거다. 조건이 갖추어져야 찬양 할 수 있는 사람, 어려움이 생기면 비로소 기도하는 사람, 둘 다 아니다. 환경이 핑계가 되지 않는 사람,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다. 우리는 언제나 핑계 댈 환경을 108개는 가지고 산다. 우리는 오늘도 ‘환경 그늘’에 앉아 있다. 조금한 상처라도 생기면 찬양도 못한다. 어려움만 닥쳐도 기도 할 수 없다. 시간만 모자라도 ‘예배 포기’를 불사한다. 그리고 말하기 시작한다. 주어진 환경 때문이라고...